Thursday 1 March 2012

[여행잡담] 동유럽, 음악 + α - Day 0

클래식 음악 듣는 여인네 소피아는 오늘도 아무 생각없이 빨래를 하며 KBS 1FM을 듣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미소를 지었다. 라디오에서는 드보르작의 신세계 교향곡 2악장이 나오고 있었고, 나는 반사적으로 그 곡을 들으며 보았던, 유로시티 차창 너머 체코의 풍경을 생각해냈던 것이다. 그제야 느꼈다. 아, 이제 그동안 귀찮다고 미뤄두었던 이 글을 쓸 시점이 왔구나.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글은 본격적인 여행기가 아니다. 단지, 동유럽 5개국 6개 도시에 발자국을 남기게 된 사연과, 왜 하필 동유럽인가에 대한 이유, 그리고 가기 전 준비랍시고 했던 좀 이상한 일들을 까먹기 전에 남겨두는 것이다. 본격적인 여행기는 다음 포스트부터 시작될 것이다.


동유럽.

동유럽 여행을 다녀왔다고 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내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 부럽다는 반응도 있었지만, 가장 두드러진 반응은 '왜 서유럽이 아닌 동유럽을 택했나'였다. 사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그 중 가장 설명하기 쉬운 것만 둘러댔기 때문에 이 글을 통해 왜 동유럽을 택했는지 말해보려 한다.

기러기 가족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 가족이 바로 그 기러기 가족이다. 아버지는 러시아를 거쳐 지금 체코에서 일하시고, 어머니는 체코와 한국을 왔다갔다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물론 그 전에 아버지께서 러시아에 계실 때에도 한번 나가면 기본 3개월은 계셨기 때문에 가족이 떨어져 지내는 건 이미 익숙해진 데다 매일 오후에 전화가 오기 때문에(체코와 한국의 시차는 8시간, 서머타임때는 7시간. 한국이 당연 빠름) 소식 못들어서 걱정된다 이런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가족이 떨어져 있다는 건 그 가족에겐 굉장히 힘든 일이다.

여하튼 이런 상황 때문에 어머니께서는 올해 초에 체코에 한번 들어가시기로 아버지와 미리 얘기가 되어있었다. 공시생 신분인 나는 5월에 시험을 칠 예정이라 혼자서 집을 지켜야 했는데, 갑자기 12월 시험이 생겼고, 완전 망쳐버린 그 시험에서 예상치 못하게 합격을 하면서 계획이 살짝 바뀌었다. 면접일까지는 두 달 남짓, 그것도 정원내라니. 그 순간 어머니께 살짝 운을 띄웠다. 나도 체코 따라가면 안되냐고. 이후 아버지와 어머니의 몇 차례 통화로 나도 따라가기로 결정되었다. 무려 3주, 정확히 말하면 24일. 그동안 만들어두고 묵혀두었던 여권을 드디어 써먹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후 뒹굴거리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중에 갑자기 아버지께서 제안을 하셨다. 아버지야 주중엔 출근모드니까 나랑 엄마랑 가고 싶은 데 돌아다니라고, 영국 프랑스 독일 핀란드 스위스 등등 가고 싶은 곳을 한번 정해보라고. 그 순간, 나의 특별하고도 특이한 성향이 내 머릿속을 휘감고 지나갔다. 저기 적혀 있는 곳은 사실 여러 사람들이 가는 곳이라 여행기도 넘쳐나고, 항공편도 많지 않겠냐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동유럽은? 내가 아는 한, 동유럽 여행기는 서유럽이나 북유럽에 비해 매우 적었다.

그래서 결정했다. 동유럽에 가자.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만큼, 내가 느낄 수 있는 것들을 더 많이 느낄 수 있지 않겠는가.

자, 이렇게 결심이 섰다. 그렇다면 이제 '내가 느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야 했다. 그 순간, 차이코프스키의 <이탈리안 기상곡(Italian Capricio)>이 뒤통수를 딱 치고 지나갔다. 이탈리아의 분위기를 전혀 몰랐기 때문에 이 곡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경험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래, 각 나라의 유명한 작곡가들의 곡을 들으며 그들의 흔적을 찾아보는 것. 클래식 음악을 막 듣기 시작한 내게는 이것만큼 클래식 음악과 가까이 할 기회가 또 있겠나 싶었다.

이후 도서관에서 동유럽 관련 책을 빌리고, 인터넷 검색을 하면서 가야 할 곳들을 정했다. 물론 한 나라를 무지막지하게 가기보단 한 도시라도 깊이있게 파고 싶었기에, 한 나라당 도시 하나씩만 짚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각 나라의 수도를 선택하게 되었다. 그래서 빈(오스트리아) - 바르샤바(폴란드) - 프라하(체코) - 브라티슬라바(슬로바키아) - 부다페스트(헝가리)의 5개 도시를 골랐고, 여기에 아버지께서 사시는 체코 프리덱미스텍까지 6개 지역을 유랑하게 되었다.

이제 갈 곳이 정해졌으니 준비를 해야 할 것인데, 사실 준비랍시고 할 게 별로 없었다. 가장 많이들 얘기하는 유레일 패스는 중간에 설 연휴가 겹치는 바람에 도저히 출국 전까지 만들 수 없을 것 같아 포기했고, 각종 도시별 카드(프라하 카드, 비엔나 카드 등등)는 몰라서 못했고(나중에 따져보니 나는 이 카드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더라) 각 나라의 언어는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로 배운 독일어와 영어 이 두 가지로 퉁치자고 생각했기 때문에 역시 포기했다. 여행경비는 일단 부모님께 손 벌리고 차차 갚겠다고 했으니 역시 땡이고, 최대 3개월 동안 비자없이 다닐 수 있는 지역이라 비자 문제도 해결. 결국 아버지 집에 가져갈 한국음식과 옷들, 기타 짐을 챙기는 일만 남아있었다.

대신 나는 남들이 안하는 두 가지 일을 했다. 하나, 루팅된 내 넥원이에 setcpu 어플을 설치해서 배터리 낭비를 최소화하는 것이었다. 각 나라마다 지도가 있겠지만, 그래도 이 녀석이 언젠가 쓰일 일이 있을 것 같아 해둔 것이다. 둘, 각 나라를 대표할 만한 음악가의 곡을 구글 뮤직과 mp3에 넣어놓는 것이었다. 그래서 고클래식 사이트(http://www.goclassic.co.kr)에 가서 관련 음원 중 내가 알만한 것들을 하나씩 골라 담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곡들을 원하는 장소에서 다 듣진 못했다. 아예 하나도 못 들은 곡도 있다. 하지만, 확실히 넣어가길 잘했다 싶다. 비행기 안에서, 그리고 기차 안에서 틈날 때마다 들었기 때문이다.

대강의 준비가 끝나고, 출국 전날 밤까지 어머니랑 둘이서 짐 싸느라 끙끙대다가 잠이 들었던 그 날. 2012년 1월 25일의 밤은 그렇게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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